▒▒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
HOME   map   FAQ   schedule   who is Mr.Y?   twitter   facebook   seedschool
   

우표
1975년이 세계 여성의 해였구나
나는 여성의 해에 태어났다.
처음으로 샀던 우표첩
유치한 표지 그림 만큼이나 유치찬란하게 내 이름에 싸인까지 만들어서 휘갈겨놨다.
분명히 기억난다.  우표 수집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시기는 내가 초등학교 오학년 때의 일이다.  우리 집에서 십 여분 정도 걸어가면 마을을 겉으로 감싸고 정릉천의 한 줄기가 가늘게 흘러가는데, 그 개천 옆에 살았던 영훈이라는 친구와 처음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그게 초등학교 오학년 때의 일이다.  

우표를 처음으로 본 것은 어머니 때문이다.  어머니와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는 편지를 자주 주고받으셨는지 월남 우표가 많았다.  모두 흐릿하게 도장이 찍혀 있는 것으로 봐서, 뒷면에 종이자국이 있는 것으로 미뤄볼 때, 편지 봉투에서 떼어낸 것이 확실했다.  어머니는 그런 우표를 많이도 가지고 있으셨다.  당시에 가난한 동네에서 문화의 혜택이란 전혀 모르고 살았던 나는, 미술작품이라면 학교 복도에 걸려있는 어디선가 복사한 그림이 전부였다.  그것도 신기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보여주신 우표첩에는 정말로 신기하고 이국적인 그림들이 많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 우표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은 해주지 않으셨는데, 거두절미하고 그걸 계기로 나도 우표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연히도 같은 취미를 가진 친구를 만났는데 그게 영훈이였다.  영훈이와 함께 겁도 없이 하루가 멀다 하고 중앙우체국 까지 버스를 타고 나가서 88올림픽 기념우표도 사고 결핵협회에서 나온 씰도 사고 그랬다.

우표는 과거를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다.  내가 태어난 1975년도가 세계 여성의 해였다는 사실을 누가 알고 있을까?  1984년에 교황 요한바오로 2세께서 한국을 방문했는지 어쨌는지, 1976년은 미국이 독립한지 겨우 200년 밖에 안 되던 해였는지 그랬는지 - 역사학자도 아닌 내가 어떻게 알까.  우표는 별로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많은 기념일에 대해서 시시콜콜 알려주는 수다쟁이 피콜로같이 높은 음을 연주한다.  그런가하면 우리나라의 오래된 우표는 낮은 음을 울리는 콘트라베이스다.  그것들이 비록 엄지손톱 하나만큼 작은 크기지만, 나이는 환갑잔치를 치러줘야 할 정도로 오래된 기억들의 중심을 울린다.  굵고 긴 숨을 내쉬면서 우표첩 한 쪽을 겸손하게 차지하고 있다.  그런 우표의 낡고 작고 희미한 프린트를 보고 있으면 나의 인생도 겸손해짐을 느낀다.  비록 이 세상을 향해서 멜로디를 연주하지 못해도, 복잡한 화음을 만들어내지는 못해도, 큰 걸음 한번 걸어보고 싶다는 넓은 가슴이 거대한 현악기의 간지러운 낮은음을 닮았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주신 우표첩을 잃어버렸다.  멍청하게도 이사를 하다가 빼먹은 모양이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정말 예쁘고 다양한 월남 우표가 많았었는데 그걸 잃어버리다니.  그렇게 내 자신을 향한 답답한 실망감이 한 삼년은 간 것 같다.  그리고 그 후에 영훈이와도 연락이 끊겼다.  고등학교 다니 던 때 상계동 어디로 이사 갔다는 얘길 들은 후로 지금껏 한번도 만나지 못했고 전화 통화 한번 못해봤다.  과거는 지나가기 마련이고 기억은 잊혀지기에 우리 머릿속은 그나마 숨 쉴만한 여유라도 있는 게 아닐까.  

지금은 잃어버린 어머니의 우표첩 대신 내가 초등학생이던 때부터 모아온 유치한 그림이 표지에 그려진 우표첩만 남아있다.  그것이라도 남아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이것으로 기억은 오케스트라 정도는 안 될지라도 조용한 현악 사중주의 구색은 되지 않을까 싶다.

2005.05.04
    
제목: 우표


사진가: * http://www.2sangbook.com

등록일: 2007-03-04 16:20
조회수: 3233 / 추천수: 69


DSC_0812_20050503_d70.jpg (84.4 KB)
DSC_0815_20050503_d70.jpg (89.3 KB)
△ 이전글

폴라로이드 220
▽ 다음글

마음의 문
의견(코멘트)을 작성하실 수 없습니다. 이유: 권한이 없는 회원레벨
Copyright 1999-2019 Zeroboard / skin by enFree


copyright 이상한나라의헌책방 2007. All Rights Reserved.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 82-27_2F :: master@2sangbook.com
-느림-바람-희망-자유-마음-생명-평등-평화-호흡-날개-나무-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