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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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비구니와 만나다
인사동 골목에서 발견한 갖가지 소리가 나는 방울과 풍경들
하지만, 사람들이나 자동차들이 혼란스럽게 떠드는게 현실이라면
이런 소리들은 새삼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오늘, 지하철을 타고 어딜 가는 길이었는데, 조용히 지하철 앞 칸 쪽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나이가 좀 든 것 같은(하지만 40대일지 50대 나이일지 구분은 애매했다.) 비구니 한 분이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손에는 절에서 전통적으로 쓰이는 모양의 연꽃으로 만든 수박만한 바구니가 들려져 있었다.  비구니는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경로석 바로 앞에 서서 자신의 목적에 대해서 설명했다.  경로석 앞쪽 약간 넓은 자리는 늘 그런 사람들의 명당자리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목소리는 꽤 맑고 우렁찼다.

비구니의 말의 대강은 이렇다.  소승은 사회봉사를 하는 비구니인데, 지금은 열 세분의 갈 곳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그 외 지체장애인 몇 분과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중에 나이가 가장 어린 아이 하나가 심장병에 걸려서 수술을 했는데 병원비가 수 천 만원이 나와서 도저히 감당할 길이 없어 지하철에서 사람들에게 작은 정성이나마 도와달라는 것이다.  늘 그렇듯이 스토리는 별로 특별한 것이 없다.  그런 식으로 말하며 구걸 비슷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출퇴근 시간만 해도 몇 번이나 마주치는 흔한 풍경이다.

물론 지하철을 타고 다니다 보면 그런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이 만나게 된다.  심지어는 몇 년 전부터 똑같은 대사만 반복하는 할아버지 한분이 있는데, 할머니가 서울대학 병원인지 어딘지에서 수술을 했는데 치료비가 얼마, 병원비가 총 얼마 라고 기계적으로(마치 반복장치를 해둔 카세트처럼) 말하고 다니는 분이다.

젊은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이유로 지하철에서 구걸 아닌 구걸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들의 표정을 보면 대부분 아무런 느낌도 없는 표정이거나 혹은 굉장히 쓸쓸한 눈빛이다.  어떤 사람들은 힘들어하는 표정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서는 두려운 얼굴빛을 볼 때도 있다.  물론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런 곳에서 알지도 못하는 여러 사람에게 돈을 얻으러 다닐 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하여간 그들의 표정은 대부분 슬픔의 빛이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도움 요청을 외면한다.

하지만 이 비구니는 뭔가 이상했다.  어린아이 하나가 수술을 했고 당장에 수 천 만원이라는 돈이 필요한 상황인데, 이 분의 얼굴빛은 텔레토비 TV방송 프로에 등장하는 햇빛모양 아가 얼굴처럼 밝기만 하다.  말을 하면서 호탕하게 웃기까지 한다.  슬픈 이야기를 하면서 도움을 요청 하려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상대방에게 자신의 처지를 최대한 처량하게 보여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이 분은 이상하게도 얼굴엔 화색이 돌았고 입가엔 시종일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누구든지 이런 상황을 상상해보면, '참으로 상식이 없는 비구니'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더욱 이상한 것은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그런 표정과 호탕한 웃음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자초지정을 다 말한 후에 비구니는 연꽃모양의 돈 바구니를 들고 상당히 가볍고 당당한 걸음걸이로 사람들 앞을 지나갔다.  승복까지 입고 있었던 비구니였지만 나는 종교적인 이념을 떠나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천원자리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아니, 집어 들려는 순간이었다.  주위를 보니 정말 놀랍게도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지갑에서 돈을 꺼내고 있었다.  그게 워낙 자연스러운 상황이라서 그렇게 연꽃 속에 돈을 집어넣는다는 것이 마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헌금함에 돈을 집어넣는 것만큼이나 익숙해보였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이상한 일이 있었다.  그런 익숙한 상황 속에서 어떤 중학생 정도나 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가 천 원짜리를 연꽃 바구니 속에 넣으려고 하는데 비구니가 그 손을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똑똑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린 학생 같은데, 용돈 받으면 얼마나 많이 받겠니?  천 원은 너무 많다.  백 원짜리 하나만 넣으면 돼."

의아했다.  비구니의 현실적 상황은 참으로 막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장에 수 천 만원이 필요하고, 더욱이 이렇게 지하철을 오가며 하루에 얼마나 모금을 할 수 있을까?  수 천 만원을 모으려면 정말로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하지만 정말로 티끌을 모아서 태산을 만들 사람이 어디 있나?

비구니의 거절은 그 아이 뿐만이 아니었다.  어떤 불교 신자인 것 같은 아주머니 한 분이 합장을 하면서 만 원 짜리를 하나 꺼내서 연꽃 바구니 속에 넣으려고 할 때도 비구니는 막아섰다.

"어차피 우리 모두 고만 고만한 중생들인데 만원은 너무 많습니다.  천 원짜리 한 장만 넣어주세요."

어느 순간 지하철 안은 이상한 분위기가 되었다.  먼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까지 비구니에게로 와서 돈을 넣어주고 가는 상황이 벌어졌다.  하지만 비구니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큰 돈을 연꽃에 넣으려고 하는 사람마다 거절 했다.  가만히 지켜보니 비구니는 오천 원짜리도 안 받는 것 같았다.  결국 한 사람에게 가장 많은 돈을 받은 것이 삼천원정도.  모든 사람에게 급하지 않은 합장으로 허리를 가만히 굽혀 인사까지 잊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칸으로 이동하기 전에 모든 사람들에게 다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물론 그때도 굉장히 환한 웃음을 보여줬다.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의 입가엔 비구니와 비슷하게 닮아있는 미소가 흘렀다.  어찌 생각하면 굉장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작은 행복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지금도 이상하게 생각되는 부분은 있다.  도대체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이해가 안가는 부분.  당장에 수 천 만원이 필요하다던 비구니가 왜 큰 돈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하면 그의 작금의 현실에서 일, 이만 원 정도가 정말로 큰 돈이 아닐 수도 있는데 왜 마다했을까?  그리고 그 얼굴에 흐르던 행복한 표정은 또 무엇이었을까.  나중에 생각해 보니 비구니는 고등학교 수학 여행때 딱 한번 봤던 석굴암의 부처를 닮아 있었다.

우리는 현실 속에 갇혀서 그 현실이 시키는 대로 마음이 움직여지는 때가 많다.  암담한 현실이라면 우리 마음과 얼굴 표정은 금방 어둡게 변한다.  그리고 기쁜 일이 있으면 당장에 환한 표정으로 바뀌기도 한다.  마치 카멜레온이 숲에 가면 자신의 몸을 초록으로 바꾸고 땅에 내려앉으면 황갈색으로 색을 바꾸는 게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본능이듯이.  우리 맘은 현실이라는 색깔이 다가올 때 본능적으로 속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건 아닐까?  당연하다는 듯이 슬픈 현실에선 슬프게, 힘든 현실에선 힘들게, 기쁜 현실에선 기쁘게.

기독교의 성경에선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내가 보기에 그 세 가지 말은 우리 인생의 최고의 교훈 이다.  아마도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긴다면, 그리고 그 아이가 처음으로 말을 하기 시작할 때 무엇보다도 나는 이 세 가지 말을 기억하도록 하고 싶다.

현실이라는 것은 인간을 꼭두각시처럼 만드는 나무에 매달린 실 몇 줄기 일 수 있다.  오늘 비구니를 만난 일을 생각할 때 그런 교훈을 또다시 생각했다.  아마도 성경에는 이런 전제조건이 살짝 숨겨져 있는 게 아닐까?

"모든 인간에게는 현실 이라는 날들이 있고 그것은 밤 일 때도 있고 낮 일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현실을 생각하기 이전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

2004.07.18
    
제목: 한 비구니와 만나다


사진가: * http://www.2sangbook.com

등록일: 2007-02-11 14:51
조회수: 3594 / 추천수: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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